
“이제 그만 용서해.”
상처받은 사람에게 이 말은 때때로 위로보다 더 아프게 들립니다.
상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는데, 나는 아직 그날의 말과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까지 내가 해야 한다고 하면 억울합니다.
왜 잘못은 그 사람이 했는데 내가 용서해야 할까요.
어쩌면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는 마음이 좁아서가 아닙니다.
용서하는 순간 내가 당한 일이 별것 아닌 일이 되어버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정의에 대한 갈망도 있다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받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을 알았으면 합니다.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았으면 합니다.
잘못했다고 인정했으면 합니다.
가능하다면 자신도 그만큼 아파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복수심으로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상처받은 마음에는 이런 외침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한 일은 잘못된 일이었다고 누군가는 말해줘.”
최근의 심리학 연구에서도 불의를 경험한 사람은 단순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넘어 훼손된 정의감이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용서와 정의는 서로 반대되는 주제가 아니라 함께 다뤄져야 할 문제입니다.
상처를 계속 떠올리는 마음도 비슷합니다.
잊어버리면 그 사람이 너무 쉽게 용서받는 것 같습니다. 기억하고 있어야 내가 당한 일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반복해서 되새길수록 분노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인관계의 상처를 반복해서 곱씹는 것이 분노 증가와 용서의 어려움에 연결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이상한 자리에 갇힙니다.
놓으면 억울하고, 붙잡고 있으면 내가 계속 아픕니다.
용서는 잘못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용서를 어렵게 만드는 오해 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하면 다시 친하게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신뢰도 회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이해해주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용서와 이런 것들은 같지 않습니다.
심리학에서도 용서는 잘못을 정당화하거나 잊어버리는 것, 책임을 묻지 않는 것,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과 구별됩니다. 용서하더라도 거리를 둘 수 있고, 무너진 신뢰가 자동으로 회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구분은 특히 큰 상처 앞에서 중요합니다.
반복적인 폭력이나 학대가 있는 관계에서 용서한다는 이유로 다시 위험한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경계를 세우고 책임을 요구하는 것과 용서는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경도 용서를 말하기 직전에 잘못을 그냥 덮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죄를 범한 사람에게 그의 잘못을 말하고, 듣지 않을 경우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의 도움을 구하며, 끝까지 듣지 않는다면 관계의 경계를 두는 과정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베드로가 묻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같은 장 안에 책임과 경계, 그리고 용서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네가 한 일은 괜찮아”라고 말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은 잘못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팠다.”
용서란 심판할 권리까지 내가 붙잡고 있지 않는 것

그렇다면 용서는 무엇일까요.
로마서 12장은 악을 악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직접 복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이 아니기 때문에 복수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최종적인 심판을 내가 맡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복수할 권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힘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는 당신이 한 일을 잊지 않을 거야.’
그 마음을 놓는 것은 상대방을 풀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일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기억이 앞으로의 내 삶까지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용서에는 더 깊은 출발점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죄라고 부르면서도 그 죄가 미움과 복수의 마지막 말을 하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용서는 상처를 축소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용서는 오래 걸립니다.
오늘 용서하기로 결심했다고 내일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연구에서도 용서는 하나의 순간이라기보다 생각과 감정, 복수하려는 동기가 변화해 가는 과정으로 다뤄집니다.
그러니 아직 용서하기 어렵다고 해서 자신의 믿음까지 쉽게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상처가 상처였음을 인정해도 됩니다.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잘못이 앞으로도 내 마음과 삶을 결정하게 둘 것인가.
용서는 상대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용서는,
그 사람이 한 잘못에게 내 남은 삶까지 내어주지 않겠다는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