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라인에서 누군가의 잘못이 알려지면 아주 빠르게 판단이 내려질 때가 있습니다.
짧은 영상 하나.
과거의 발언 하나.
잘못된 행동 하나.
사실관계가 확인되기도 전에 이름이 퍼지고,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잘못한 행동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그 사람 전체를 설명하는 문장이 됩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필요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부당한 행동이 드러나고, 이전에는 말하기 어려웠던 피해자의 목소리가 들리게 된 것도 온라인 공간이 만들어낸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은 남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했다는 것과 그 사람이 곧 그 잘못 자체라는 것은 같은 말일까요.
온라인에서는 분노가 빠르게 모인다

사람이 부당한 일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도덕적 분노는 공동체가 무엇을 옳고 그르다고 여기는지 드러내고, 잘못에 책임을 묻게 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문제는 온라인에서 그 분노가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트위터 데이터를 활용한 연구에서는 분노를 표현한 게시물이 긍정적인 사회적 반응을 받을수록 이후에도 분노 표현이 증가하는 경향이 관찰됐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온라인 집단에서 어떤 감정 표현이 일반적인지도 학습했습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같은 내용이라도 이미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다는 신호가 있을 때 위협을 더 크게 느끼고 도덕적 분노를 표현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니 온라인의 분노를 모두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 잘못에 대한 정당한 분노일 수 있습니다.
다만 플랫폼의 구조는 그 분노를 더 빠르고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최근 연구들을 종합한 리뷰에서도 소셜미디어는 도덕적 판단과 처벌의 비용을 낮추고, 분노와 공개적인 비난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동시에 사회적 연대나 집단행동 같은 긍정적인 도덕 행동을 확대하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아무도 멈추지 않는 순간입니다.
각 사람은 댓글 하나를 남겼을 뿐인데 한 사람에게는 수천 개의 돌이 날아옵니다.
실제로 동일한 비판이라도 수많은 사람이 한 사람에게 몰려들면 제삼자는 그 비판을 과도한 집단 처벌로 느끼고 오히려 처음 잘못한 사람에게 더 큰 동정을 보일 수 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정의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처벌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행동보다 사람을 규정하고 싶어 할까

잘못을 말하는 것보다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훨씬 쉽습니다.
“그가 이런 잘못을 했다”라고 말하려면 사실을 살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하고, 책임의 크기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간단합니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한 문장이 모든 것을 정리합니다.
과거의 다른 모습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바뀔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을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하면 세상이 조금 더 명확해집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가해자와 피해자.
우리와 그들.
그리고 그 경계의 이쪽에 서면 이상하게 마음이 안전해집니다.
‘적어도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어쩌면 누군가를 취소하는 마음에는 정의감뿐 아니라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섞일 수 있습니다.
최근 캔슬 행동을 직접 조사한 연구에서도 어떤 행동을 도덕적 위반으로 인식하고 강한 도덕적 분노를 느끼는 것이 취소 행동과 연결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연구자들 역시 캔슬 컬처가 아직 충분히 정립된 하나의 심리 현상은 아니며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 모든 비판을 같은 동기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는 있습니다.
나는 지금 잘못을 바로잡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이 사람을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것일까.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잘못을 모른 척하지 않으셨다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세금 체계와 연결된 직업이었고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겠다고 하시자 사람들은 곧바로 말합니다.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
그들에게 삭개오는 이미 설명이 끝난 사람이었습니다.
죄인.
그런데 예수님은 군중이 붙여놓은 한 단어로 그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그리고 그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 만남 속에서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다시 부르십니다.
이 장면을 잘못을 가볍게 여긴 이야기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변화에는 책임이 따라옵니다.
삭개오는 피해를 입혔다면 갚겠다고 말합니다.
은혜가 책임을 없앤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책임을 묻기 전에 그 사람의 존재부터 삭제하지 않으십니다.
군중은 ‘죄인’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잘못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사람을 끝내지 않는 것

사람을 그의 가장 나쁜 순간보다 크게 본다는 것은 잘못을 덮자는 뜻이 아닙니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범죄에는 법적 책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퇴나 직무상의 책임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변화에는 때때로 사과와 배상, 신뢰를 다시 쌓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책임 없는 관용이 아닙니다.
하지만 복음에는 동시에 아주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최악의 행동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본래 착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면서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가 가볍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아주 심각하게 봅니다.
하지만 부활은 죄와 죽음에게 한 사람의 마지막 문장을 쓰게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에는 책임이 있지만 회복의 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누군가의 몇 초를 볼 수 있습니다.
한 문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 번의 끔찍한 선택을 알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그 사람에 관한 진실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 사람 전체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 앞에서 배워야 할 것은 침묵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가 아니라,
“저 행동은 잘못되었다.”
이 둘 사이에는 작은 차이처럼 보이는 아주 큰 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을 판단합니다.
다른 하나는 존재 전체를 판결합니다.
정의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지 않은 자리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가장 나쁜 순간이 그 사람의 마지막 이름까지 되게 하는 자리 말입니다.

